5,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화폭에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단 한 번도 담지 않은 화가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1841~1919)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가장 밝고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했고 행복한 분위기와 기쁨의 인상이 넘쳐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에게도 어두운 삶의 시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자라온 그는 물감 살 돈이 없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버텨내야 했고, 말년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지독한 류마티스관절염을 앓았다. 붓을 손에 쥘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의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 오늘날이었다면 관절 변형이 생기기 전에 관리받아 섬세한 그림을 더 많이 남겼을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즐거운 삶을 그린 가난한 화가 선상 위에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화려한 무도회장 풍경…. 르누아르는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을 즐겨 그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그의 삶이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세 살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생계 때문에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이때의 경험은 그가 평생 화가의 길을 걷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스무 살 무렵,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아틀리에로 들어간 르누아르는 귀족들의 초상화나 부르주아가 여가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그려주며 화가로서의 삶을 연명해 나갔다. 물감을 넉넉히 살 형편이 안 될 만큼 힘든 삶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작업에만 몰두했다. 부단한 노력 끝에 1878년,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 그는 차츰 부와 명성을 얻으며 마음껏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작품 <두 자매>(1881)를 끝으로 더 이상 귀족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 무렵, 르누아르는 작품 <뱃놀이 일행의 오찬>처럼 대작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이 그림은 그의 친구들이 보트 위에서 여유롭게 식사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훗날 자신의 부인이 되는 여인과 동료 화가, 친구들이 한데 모여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여자는 르누아르의 전속 모델이자 훗날 그의 부인이다. 재킷을 입고 있는 멋쟁이 남자는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로 르누아르와 절친한 사이였다. 어두운 시기, 자신의 곁에서 늘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들을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대작의 주인공들로 묘사한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계속된 그림 열정 그는 평생 소박하고 성실한 장인 정신으로 작업에 임했으며 오로지 회화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다. 마흔이 넘어 명성을 얻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후에도 그는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언제나 카페, 공원, 거실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것만 같은 소소한 일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한 점의 불행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그림을 그렸지만, 말년에 육체를 침범한 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50대에 류마티스관절염을 앓게 된 것이다. 류마티스관절염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관절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주로 손가락, 발가락, 무릎, 발목, 팔꿈치에 발생하며 양측 관절이 대칭적으로 침범되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보통 관절의 한 부분에서 통증이 나타나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시에 여러 관절에서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아픈 부위를 누르면 통증이 심해지고 관절이 부으며 만졌을 때 열이 난다. 특히 아침에 관절이 뻣뻣해져 활동 시 불편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조조강직이 1시간 이상 지속되면 류마티스관절염을 강력히 의심해야 한다. 뚜렷한 발병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근 다양한 항류마티스 약제가 새롭게 개발되어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기에 추위에 더욱 악화하는 증세를 막아보고자 그는 따뜻한 남프랑스에서 겨울을 나는 방법을 택했다. 66세 때는 아예 지중해안의 마을에 정착했으나 따사로운 햇살도 관절염의 통증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섬세한 화풍을 바꾼 류마티스관절염 류마티스관절염은 발병 후 1년 이내에 치료하면 관절 변형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1~2년 이상 지나면 관절 조직의 대부분이 파괴되므로 병이 진행되지 않도록 조기에 진단해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르누아르는 60대에는 지팡이에, 70대부터는 휠체어에 몸을 맡겨야 했다. 손가락 관절들이 붓고 비틀어져 손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고 나중에는 온몸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러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겪었다. 그가 43세 때인 1884년에 3년에 걸쳐 그린 <목욕하는 여인들>은 르누아르가 평생 추구했던 인체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78세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남긴 같은 제목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화풍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볼 수 있따. 형태보다는 붉은 색감을 강조해 표현했고, 풍만해 보이는 인물은 쇠약해지는 자신의 신체 상태와 현저하게 대조를 이룬다. 르누아르는 후기작에서 붓을 더 느슨하게 사용했다. 류머티즘으로 인해 그의 손은 뒤틀렸고 이미 오래전에 정교한 손재주를 잃은 상태였다. 나중에는 붓을 손에 쥘 수 없게 되었음에도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 비틀어진 손가락 사이에 붓을 넣고 끈으로 묶어 맨 채 통증을 이겨내며 캔버스에 붓을 찍듯이 그림을 그렸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고통과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 그에게 한 지인이 "그런데도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묻자 르누아르는 대답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눈과 마음으로 그린다.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은 생명력이 없다. 이 고통이야말로 내게는 값진 스승이다."
그는 많은 이의 염려를 무릅쓰고 작업을 지속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까지 끈질기게 활동했고 심지어 아예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조수를 시켜 무언가를 빚고 그리려고 했다. "인생 자체가 우울한데 그림이라도 기쁨에 넘치고 활기차야 한다"고, "비극은 누군가가 그릴 테니 내 그림만은 밝아야 한다"고 말했던 르누아르. 그의 작품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흔들리며 피어난 꽃이다. 어둠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같이 환한 그의 작품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