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가 뭘까?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손에 들고 던지는 부케(Bouquet)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시조새 급. ‘부캐’는 본래 게임에서 널리 사용되던 용어로, 본래 사용하던 계정이나 캐릭터 외에 새롭게 만든 ‘부캐릭터’를 줄인 말이다. 그러다 일상생활로 그 사용이 확대되면서 '평소 내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로 행동할 때'를 가리키는 말로 활용되고 있다. 방송인 유재석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드러머 유고스타, 트로트 가수 유산슬, 연예기획사 대표 지미유 등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 것이 부캐 전성시대의 시작. 부캐로 활동하는 새로운 유행은 직장인 사이에서도 번지고 있다.
‘MZ세대’의 새로운 놀이법 부캐 트렌드 이해하기 *MZ세대란?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제트세대를 통칭하는 말 눈치 없이 아는 체하지 말 것.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이라도 철석같이 지키는 매너를 갖출 것. 다소 허술해 보여도 그러려니 하고, 논리를 따지지 말 것. 설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왼쪽부터>유재석 부캐 '신박기획 대표 지미유' 출처. 놀면 뭐하니/김대엽 부캐 '카피추' 출처.김대엽 인스타그램/김신영 부캐 '둘째이모 김다비' 출처. 미디어랩시소 이 정도의 암묵적인 약속을 기억한다면 ‘부캐’를 즐길 기본적인 준비는 마친 셈이다. 부캐의 대표주자인 방송인 유재석뿐 아니라 개그맨 김신영도 ‘둘째 이모 김다비’라는 부캐로 활약한다. 1945년생 신인 가수로 빨간색 골프웨어를 입은 그는 새벽 수영으로 시작하는 하루부터 아들이 셋이라는 가정사까지 캐릭터 설정이 꽤 구체적이다. 개그맨 김대엽은 사람들이 다 아는 유행곡을 섞어 부르면서도 자신이 만들었다고 능청을 떠는 ‘카피추’ 부캐로 전성기를 맞았다. 산에 살며 속세와 접촉이 없어 절대 표절은 하지 않는다는 컨셉이다. 물론 대중은 이들의 시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아는 체하지 않는다. 우주 대스타를 꿈꾸며 남극에서 한국까지 온 연습생 ‘펭수’도 마찬가지. 펭수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형 탈 안에 누가 있어요?’라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팬들은 ‘묻지 마라. 펭수는 펭수일 뿐’이라고 응수한다. 집단보다 개인에게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세대는 설정된 자아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에 주목하며 스스로 역할 놀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하이텔에서부터 소셜 미디어까지’ 부캐의 탄생과 확장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고 부계정을 여러 개 만드는 요즘 ‘부캐’는 사실 낯설지 않은 개념이다. 부캐의 조상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후반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 통신을 통해 처음 생긴 ID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싸이월드 전성기 시절 아바타도 따지고 보면 부캐라 할 수 있다.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상과 현실, 직장과 퇴근 후 등 인간이 적응해야 할 환경이 많아지면서 거기에 맞는 캐릭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이다가 퇴근하는 순간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달라진 한국 사회의 변화들이 투영돼 있다. 그 첫 번째는 ‘개인의 확장’이다. 1970년대 개발 시대에 압축 성장을 일궈낸 힘은 개인보다는 가족을, 나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먼저 추구했던 가치관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가족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은 1990년대 IMF를 겪고 2000년대 초반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급격히 개인주의로 변화했다. 한번 직원으로 들어가면 평생을 책임져 주던 이른바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이제 한국인들에게 중요해진 건 바로 나 자신이 됐다. 합리적 개인들은 일이 중심이던 집단주의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했다. 이른바 ‘워라밸’이 직장인들의 새로운 가치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Work)의 영역이 전부였던 과거에는 ‘본캐’만 존재했지만, 일 바깥(Life)의 영역도 중요해진 현재에는 그 다양한 세계를 탐험할 ‘부캐’들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다.
‘내 안에 또 다른 나 있다’ 행복을 위한 ‘멀티 페르소나’ 회사에서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 친목 모임에서의 나는 같지 않다. 한결같은 것이 미덕인 시절은 지나가고 요즘은 연예인뿐 아니라 개인도 시시각각 캐릭터를 바꾸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일명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다.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단어다. 따라서 멀티 페르소나는 ‘다중적 자아’라는 뜻으로 상황에 맞게 가면을 바꿔 쓰듯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현대인을 일컫는다.
퇴근 후 대리운전이나 배달 등을 하는 ‘투잡족’이나 여러 개(N)의 직업(Job)을 갖고 활동하는 ‘N잡러’와는 결이 다르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일의 영역이라면, 부캐는 취향과 취미의 영역에 가깝다. 퇴근 후 요가나 기타연주를 하고 마카롱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등 금전적 이유를 넘어서 다양한 부캐 활동을 통해 건강관리와 취미활동 등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부캐가 바꾸는 사회 일석이조 나만의 ‘부캐’ 만들기
부캐의 유행은 사회 흐름으로까지 이어진다. 미래의 소비자는 한 명이 아니라 0.1명 단위로 세분화 된다는 것이 기업들의 전망이다. 창업 시장에서는 한 지붕 두 업종인 ‘숍인숍’ 전략을 내세우고 카카오는 대화 상대별로 프로필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멀티프로필을 출시했다. ‘야누스 소비’에도 주목한다. 이는 고가의 한정판 운동화를 구매하거나 취미활동을 하는 데는 선뜻 지갑을 열면서도, 식사는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대신하고 생필품 구매는 인터넷 최저가만 찾는 유형을 말한다.
새로운 사람과 소통하며 시야를 넓히고자 시작한 부캐로 추가 수입까지 얻는 것을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한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으로 본업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계획적으로 하는 것이다.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스톡사진 사이트에 판매해 수익을 올리는 ‘스톡사진 재태크’를 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운 경험이 있거나 관련 상식이 있다면 펫시터 부업도 주목할 만하다. 재능마켓 플랫폼을 통한 재능판매도 가능하다. 엑셀, 디자인, 통·번역, 레슨, 자소서 첨삭처럼 전문적인 분야부터 녹취록 작성, 연애상담, 모닝콜, 쇼핑 동행 등 다양한 생활 서비스까지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바야흐로 부캐도 능력이고 재산인 시대. 지금껏 본캐의 틀에 갇혀 있던 나를 살려 다양한 즐거움과 가능성을 찾아보면 어떨까.
참고자료: <트렌드 코리아 2021> 김난도 외. <사이드 프로젝트 100> 크리스 길아보 지음. ‘부캐의 세계가 열리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머니 플러스 기사. 이미지 출처: instagram.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