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전북 남원 속도에 밀려 잊어버리고 살았던 고즈넉한 옛 정취를 찾아 남원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요즘, 그렇기에 옛것이 더욱 그립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남원은 이 땅의 역사와 풍경을 오래 지녀 온 고장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문학인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이며, 동편제 판소리와 추어탕의 본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호남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손꼽히는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깃든 광한루원 누가 뭐래도 남원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춘향전이다. 남원 시내 중심지에 자리한 광한루원은 춘향과 몽룡이 인연을 맺은 장소인 광한루가 있는 정원으로 유명하다. 광한루는 조선의 명재상 황희가 세운 것으로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먼 옛날 사람들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상했던 달나라 궁전을 지상에 구현해 만든 것이라니,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광한루 아래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이 있고, 그 위로 오작교가 가로지르고 있는 광한루원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처럼 아늑하고 예스럽다. 부부가 함께 건너면 금실이 더 좋아지고,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오작교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건넌다. 연못 위로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커다란 잉어들이 떼를 지어 발밑으로 모여든다. 귀한 새인 원앙도 햇빛에 반짝이는 빛깔을 뽐내며 유유자적 연못을 노닌다.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낭만이 두 배 되는 남원의 밤 남원에서의 하루는 해가 저문 후에도 이어진다. 광한루원은 아름다운 조명이 켜지는 밤이면 더욱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오작교와 어우러진 광한루뿐만 아니라 영주각, 방장정, 완월정 등도 낮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후 6시 이후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 낮과 밤의 모습을 부담 없이 비교하며 즐길 수 있다. 노을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광한루원 주변도 은은한 빛깔로 물든다. 한옥 돌담길이 예쁜 예촌거리와 광한루원 앞을 흐르는 요천강 산책길은 저녁이면 수천 개의 청사초롱이 불을 밝혀 밤거리를 걷는 이들의 모습을 비춘다. 달나라 선녀들의 전설을 담아서 만든 승월교 위에서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아름답게 빛나는 남원 야경을 마음에 담아본다. 남원을 지킨 충절의 혼이 이곳에, 만인의총 ‘사랑’이 어디 남녀 간에만 오가는 이야기일까. 남원을 사랑한 이들이 남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흔적이 ‘만인의총’에 있다. 광한루원에서 차로 약 5분 거리에 있는 만인의총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순절한 지사들을 모신 사적이다. 전투가 끝난 뒤 피란에서 돌아온 남원 백성들이 시신을 한곳에 묻고 충렬사를 지었다. 임진왜란의 패배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왜군은 섬진강과 낮은 고개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로 연결되는 요충지 남원을 집중공격했다. 당시 남원성을 방어하다 순절한 충신과 병사, 주민의 숫자는 1만여 명. 그 처참한 숫자 앞에 그저 말문이 막힌다. 지사들의 무덤인 만인의총 앞 충렬사 사당 안에는 전사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제단마저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파괴되고 제사까지 금지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역사문화관에서 당시 기록을 통해 남원성 전투에서만 전리품으로 베어진 코가 1,596개라는 것을, 인근 도공들을 모두 끌고 가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남원의 역사는 지킴의 역사다. 후손들에 의해 장엄하고 품격 높게 가꾸어진 만인의총에서 선열들의 피와 눈물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역사문화관에서 바라본 만인의사 순의탑
남원의 시간을 한눈에, 남원다움관 광한루원 후문 인근에 자리한 ‘남원다움관’은 남원의 지난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해 둔 공간이다. 외부에는 레트로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포토존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남원 근현대 거리를 나만의 아바타를 활용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메타버스 놀이터’라는 것이 독특하다. 남원의 1960~1970년대를 재현한 2층 전시관은 옛 사진관부터 다방, 이발관 등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 모든 게 남원 시민들의 기증으로 탄생했다니 더욱 정감있게 느껴진다. 흑백 사진으로 기록된 남원 시민들의 행복한 순간부터 인력거를 타고 3D로 재현한 남원의 명소를 여행하는 것까지, 새로운 기술과 오래된 낭만이 조화롭게 버무려져 있다. 포근하고 정성스러운 남원의 맛 남원은 빵에도 전통과 문화가 있다. 1978년 개업한 이래로 남원의 대표 빵집이 된 명문제과는 전국 각지에서 이곳의 빵을 맛보기 위해 남원을 찾는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생크림 슈보르, 꿀 아몬드, 수제햄빵이 대표 메뉴. 세련되진 않았지만 정성스럽고, 맛있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명문제과와 한 블록 거리에 있는 카페 월향재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빙수 맛집으로 소문난 남원의 핫플레이스다. 감성 카페에서 즐기는 망고 빙수와 말차 가베는 남원의 정갈하고 여유로운 정취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예술과 자연을 담아낸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덕음산 자락에 차분하고 감각적인 외관의 미술관이 세워졌다. 2018년 문을 연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에서 태어난 화가가 자신의 작품 400여 점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김병종 화가의 생명력 넘치는 작품뿐만 아니라 남원이 품고 키워낸 작가들의 삶과 예술도 만날 수 있다.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좋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산을 따라 흐르는 구름과 산들산들 부는 바람, 소란스럽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며 편안한 휴식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