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은 계절이다. 바람 따라 흩날리는 꽃비 맞으러 하동으로 떠난다. 미풍에 흩날리는 꽃잎이 햇살처럼 간지럽고 솜사탕처럼 보송보송하다. 꽃길만 걸어요, 십리벚꽃길 봄기운인 온 땅에 흐드러지면 먼저 섬진강을 따라 벚꽃길이 펼쳐진다. 왕복 2차선에 오래된 벚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마치 꽃 터널을 지나는 듯한 꽃길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신작로가 개설되어 마을 사람들이 벚나무 1200그루를 심으로 탄생했다. 화개의 꽃길은 이미 십리벚꽃으로 잘 알려져 있다. 4월로 접어들 때쯤이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국도는 사람으로, 꽃으로 어질어질하다. 상춘객으로 꽉 만힌 도로 안에 있어도 괜찮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분홍빛 꽃물이 든 것 같고 살랑살랑 창문으로 들어오는 꽃잎에 그저 마음이 설렌다. 이 길의 다른 이름은 '혼례길'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이 길을 걸으면 부부로 맺어져 백년해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람에 날리는 분홍 꽃 이파리를 맞으며 함께 걸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겠다. 그만큼 황홀하고 낭만적이다. 벚꽃길을 따라 오르면 쌍계사에 이른다.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매표소 앞다리 아래 합쳐져 흘러간다. 쌍계사라는 이름이 지어진 연유다. 졸졸졸 흐르는 물 흐르는 소리와 경건하게 울리는 목탁 소리, 아담하게 조성된 대숲. 누군가 쌍계사를 두고 벚꽃보다 아름다운 사찰이라 하니, 직접 와서 두 아름다움을 비교하며 감상하면 좋겠다.
'구경 한번 와보세요', 화개장터 쌍계사에서 다시 벚꽃 터널로 내려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화개장터다. 이웃사촌 광양사람과 구례사람 그리고 하동사람들이 모여 들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자를 교환했던 곳. 같은 이름의 노래 덕에 전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오일장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북적이지는 않지만, 벚꽃 피는 이맘때면 상인들이 좌판을 열고 관광객들을 반긴다. 직접 따서 말렸다는 약초와 나물, 차, 과실들이 그득하다.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사는 사람 마음이지만, 푸짐한 인심과 친절한 응대에는 쉽사리 지갑을 열게 된다.
읍내 곳곳 만나는 하동 독립운동의 흔적들 작은 고을 하동의 독립 열기는 산세만큼이나 깊고도 치열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산천을 물들였다. 그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들이었다. 하동 읍내 지역민들도 가세했다. 하동의 3·1운동 1919년 3월 18일 적량리 하동시장에서 당시 적량면장이던 박치화 선생이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작됐다. 교사들의 주도로 읍민들과 상인들이 일제히 동참했고 인파는 순식간에 1,500명이 넘었다. 당시 박치화 선생이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는 지역민 12명이 모여서 작성했는데, 당시 경성이 아닌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지역은 전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후 금남면 출신 정낙영, 이범호 선생 등은 남해까지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유림 정규영 선생은 1919년 파리민족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한독립선언문인 '파리장서'에 이름을 올렸다. 하동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읍내리 산 언저리에는 '하동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만드는 형상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옆으로 하동 출신 52명의 독립운동서훈자 명단이 새겨진 조형석이 세워졌다. 1919년 봄,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 만세 운동이 남쪽 끝자락 하동에서도 강렬한 독립 투지로 뜨겁게 불타올라 오늘에 이어진다. 한눈에 담아보는 하동의 아름다움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과 남도의 젖줄인 섬진강, 그 젖줄 아래 남해의 다도해를 거느린 한려수도, 이름만으로 화려한 자연들이 감싸 안고 있는 하동을 마지막으로 한눈에 담아보자. 하동 '스타웨이' 전망대에 오르면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였던 넓고 비옥한 평사리 평야와 발아래 흐르는 섬진강을 만날 수 있다. 눈 돌리는 곳, 마음 닿는 모든 곳이 나를 위로하는 곳. 하동의 매력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