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세 인물은 모두 1986년 명성황후 시해자 처벌을 주장하고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호남지역 을미의병의 주요 인물들로 장성과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2월 장성향교에서 최초로 호남의병을 일으킨 기우만 선생은 단발령의 철폐, 일본세력의 축출, 개화정책의 반대 등을 내세웠으며 의병해산 이후에는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여 의병의 활약상을 상세히 정리하였다. 김익중 선생은 1907년 대장 기삼연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회맹소 의병들은 거점을 마련하려 고창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김익중은 고창읍성을 탈환하려는 일본 군경의 습격에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박원영 선생은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바로 달려가 참여하였고,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을 맞이하는 실무를 주관했다. 의병해산 이후 진위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세 사람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 정책이 극에 달하던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선생들은 학교에 만연한 민족 차별을 목격하고,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유흥수 선생은 비밀결사 ‘문예부’에 참여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의지를 담은 기관 잡지 ‘학생’의 발간에 앞장섰다. 1941년 선생들은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여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비밀결사 ‘다혁당’을 조직하고 활동을 이끌었다. 권쾌복 선생은 독립 후 언론계에 몸담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유흥수 선생은 공직과 경제계에서 활동하고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배학보 선생은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달의 전쟁영웅
부산 출생으로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1951년 중공군의 1·2차 춘계 대공세 당시 한석산·가리봉 전투와 현리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0월 2일 일명 ‘피의 고지’라 불리는 강원도 748고지 탈환을 위해 선두에서 부대원을 이끌며 기습 공격을 벌여 고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가슴에 적포탄을 맞아 후송 3일 만에 전사했다.
영국 육군 왕실 스코틀랜드 국경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6·25에 참전, 1951년 11월 4일 군사 요충지였던 마량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속 백병전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중대 철수작전을 완수했다. 1952년 1월, 부상으로 영국으로 후송되었으나 3개월 뒤 자진하여 돌아와 그해 8월까지 전장을 누볐다. 2018년 타계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