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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의 흔적을 찾아서부암동의 별헤는 밤
부암동의 별헤는 밤

부암동의 별 헤는 밤
종로의 고즈넉하고 분위기 있는 동네 부암동에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그저 익숙하게만 바라본 풍경이라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며 걷다 보면 우리는 장소를 걷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을 걷고, 문화와 역사를 거스르게 된다.
낭만과 운치 가득한 골목길
인왕산과 북악산에 둘러싸인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그 흔한 고층 건물이 하나 없는 동네다. 산자락 능선을 타고 자리 잡은 동네는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줄 만큼 정겨운 풍경들이 그득하다. 옹기종기 어깨동무하고 자리 잡은 집들 사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발걸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오래된 길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부암동과 청운동을 연결하는 자하문 터널 계단은 영화 ‘기생충’의 배경이 됐다.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 박 사장 가족을 피해 기택네 가족이 도망 나와 달려가던 곳이다. 계단을 통해 계층의 차이를 표현하려는 봉준호 감독에게 선택된 장소다.

부암동의 별헤는 밤영화 '기생충'의 촬영지가 된 자하문 터널 계단

부암동은 문학인들의 발자취가 유독 많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운수 좋은 날'로 잘 알려진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고, 마당에서 횡보 염상섭, 월탄 박종화 등과 닭과 달걀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부암동에서 효자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서촌에서 하숙을 했던 윤동주는 종종 이 주변을 찾아 시를 썼다고 한다.
서붓서붓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약해진 물줄기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게 해주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가 윤동주문학관으로 재탄생했다. 시인의 발자취와 시선을 기억하고자 2012년 개관한 이곳은 윤동주의 정신을 공간으로 승화한 수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문학관은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의 방황과 고뇌, 그리고 부끄러움의 감정을 시로 써나갔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커다란 창에 햇살을 가득 품은 첫 번째 전시실은 시인의 순결한 시심을 상징하는 순백의 공간이다. 윤동주의 대표 시집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일대기가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건 일본 유학길에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닷새 후 쓴 ‘참회록’ 원고의 영인본이다. 원고지 여백에는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듯한 흐린 연필 낙서들이 보인다. ‘시인의 생활’, ‘힘’이란 여백의 글들을 보면서 당시 시인의 슬픔을 짐작해 본다. 제2전시실에서는 외관에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천장을 개방한 공간이 등장한다.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하늘과 바람과 별’이 함께하는 중정을 만들고 이를 ‘열린 우물’이라 이름 붙였다.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가는 제3전시실은 ‘닫힌 우물’이다. 빛이 차단된 이곳은 시인이 생을 마감했던 어두컴컴한 후쿠오카 감옥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곳에서 상영되는 시인의 일대기를 다룬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의 고독과 숙명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시관을 나서며 조선어로 시를 쓰며 불온한 사상을 전파했다는 죄로 수감되어 스물여덟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시인의 삶을 다시 그려 본다.
문학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언덕’에는 그의 대표 작품인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시정을 담곤 했던 곳으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을 탄생시킨 무대가 바로 이 언덕이다.

부암동의 별헤는 밤

한양도성 성곽을 잇는 돌계단 위로 올라서니 인왕산과 북악산, 도시와 궁궐이 어우러진 웅장한 장관이 펼쳐진다. 시인 윤동주 역시 걷고 바라보았을 이곳. 분명 다른 시대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이 길이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숲속으로 이어지는 문학의 길
서울 도심의 감춰진 마을, 조용하고 정감 가는 부암동에는 색다른 공간이 많다. 시인의 언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인왕산 자락 속 단아한 한옥의 기와지붕이 눈에 띈다. 한옥의 고즈넉함을 만끽하며 문학의 향기를 즐길 수 있는 ‘청운문학도서관’이다. 누정에 앉아 흐르는 폭포를 바라보며 호젓한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인왕산 중턱에 홀로 가지런히 자리 잡은 ‘초소책방’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청와대 방호를 위해 50년 넘게 경찰 초소로 사용됐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지은 북카페로 기후, 바이러스, 온난화 등 특히 환경 관련 주제의 도서를 중심으로 서고를 꾸며놓았다. 탁 트인 서울 시내와 남산타워를 내려다보며 음료와 함께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이 가을, 호젓한 숲속에서 책과 함께 마음을 다듬는 산책을 즐기며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해보자.

종로구 부암동 _Travel Tip_
서울미술관 속 석파정에서의 시간여행
왕이 사랑했다는 정원이 있고, 정원과 통하는 미술관이 있으니 풍경과 작품에 반하는 곳이 바로 ‘석파정 서울미술관’이다. 현대 미술을 주제로 다양한 기획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위층으로 오르면 관람이 끝나는 지점에 야외로 향하는 문이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보물 같은 풍경이 담긴 곳.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의 별채이자, 고종의 행차가 있었던 공간인 석파정이다. ‘물과 구름이 감싸 안은 집’이라는 듯의 석파정은 왕의 국사와 쉼이 모두 이루어진 공간으로, 수려한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석파정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자.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한 한옥, 무계원
부암동이 올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골목골목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560m 길인 ‘무계정사길’은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무릉도원도’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 길목에 있는 ‘무계원’은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도심 속 전통문화공간으로 고즈넉한 한옥에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전시를 열고 있다. 본관 ‘오동나무 뿌리와 복숭아 꽃잎’ 전에서는 신진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9.1부터 9.20까지) 별관에서는 개화기 종로의 모습을 영상으로 제작한 ‘무계원 사람들’이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다. (9.12부터 11.26까지) 시간을 이어온 문화 예술에 공간이 주는 힘이 더해져 부암동만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부암동의 별식, 천진포자와 계열사
주문과 동시에 바로바로 만들어주는 중국식 만둣가게 ‘천진포자’와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울 3대 치킨집이라 불리는 ‘계열사’는 인왕산 등산객과 부암동 여행객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맛집이다. 중국 만두의 한 종류인 포자(바오쯔)는 쫀득한 피에 씹으면 육즙이 터지고, 기본에 충실해 담백하면서도 바삭함이 살아있는 치킨은 부암동을 개성 넘치는 맛의 동네로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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