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보훈원 정인채원장·오성규 애국지사100세 광복군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수원보훈원 일본에 생존해 있던 마지막 독립유공자이자 광복군 오성규 애국지사가 지난 8월 13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남은 생은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올해 100세인 오 지사의 보금자리는 보훈원에 마련되었다. 무릎에 태극기를 얹고 휠체어를 탄 오 지사가 수원 보훈원에 들어서자 환호의 박수가 쏟아졌다. 이름 없는 영웅의 귀국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치열하게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오성규 애국지사도 그중 한 명이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오 지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만주로 떠났다. 일본군으로 징용되느니 광복군에 합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광복군이 있는 충칭까지 꼬박 20일을 짚신을 신고 걸어갔다. 다리가 다 터져 피가 나도록 걸어 그가 합류한 건 광복군 제3지대. 김구 선생을 조우하기도 했던 그는 1945년 미국 CIS의 전신인 미군 전략사무국(OSS)에 들어가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격을 준비하다가 해방 소식을 들었다. “새벽에 무전훈련을 받을 때였지 아마. 일본놈들이 항복한다 그래서 다 같이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던…. 그랬던 기억이 나요.” 1923년생인 오 지사는 “나이가 드니 잊어버리는 게 많다”면서도 독립을 맞던 순간만큼은 기억이 생생하신 듯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고생이랄 것도 없지. 그때는 모두들 독립을 위해, 나라를 위해 애를 썼으니까. 국민으로서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 광복 후에도 오 지사는 교민 보호를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군 군사 특파단의 상하이지구 특파 단원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이념으로 갈린 한반도에서 그가 설 곳은 없었다. 생계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그곳에서 한국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일궜다. 2018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지내던 오 지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조국에서 보내고 싶다며 뜻을 밝혔고, 이에 정부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해 오 지사를 모셔 오게 됐다. 그렇게 10대의 나이에 광복군이 되었던 청년은 길고 긴 인생의 여정을 지나 100세에 이르러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조국을 위한 희생과 헌신, ‘정성과 예우 다해 섬길 것’ 오성규 애국지사는 광복군의 위용을 보여주듯 귀국 후 곧바로 서울현충원을 찾아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서 환국 신고와 참배를 마쳤다. 그 후 중앙보훈병원에서 2주 정도 머물며 종합정밀건강검진과 집중 케어를 받은 뒤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된 수원보훈원에서 안정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훈원은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들의 의식주 일체를 지원하는 곳이다. 정인채 보훈원장은 “임대 아파트와 장기요양시설 제공, 전담 주치의의 건강관리 등 국가유공자분들이 노년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토탈케어시스템을 지원한다는 점이 큰 자부심”이라고 힘줘 말했다. 오 지사가 지내는 방에는 침대와 책상, 소파,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이 가지런히 비치되어 있다. 침대가 의료용 전동침대라는 것만 제외하면 여느 작은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독립 공간이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벽면에는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걸려있다.
오 지사는 1990년 노태우 정권 시절,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애족장에 적혀있는 이름은 주태석. 광복군 시절 사용한 가명이다. 일제의 추적과 보복을 피하려고 광복군 사이에선 본명이나 고향을 서로 밝히지 않은 채 가명만을 사용했던 탓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이뤄질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춤이 없었던 무장투쟁과 이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삶이 그려지는 부분이다. “국가유공자분들의 예우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다시금 생각해보면서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숭고한 가치가 세대 간 공유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보훈원이 앞장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인채 보훈원장은 “역사의 산증인이신 오성규 애국지사를 직접 맞이하고 보훈원에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럽다”며 오 지사의 항일정신과 독립운동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노후 생활부터 눈 감는 날까지, ‘믿고 모든 걸 맡길 수 있어 고마운 곳’ 1963년 개원해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한 보훈원은 국가유공자를 위한 최초의 복지시설이다. 2009년 전문요양센터와 이듬해 전문의를 비롯해 간호사, 물리치료사가 상주하는 보훈의원을 개설하면서 어르신들을 위한 보다 전문적인 케어가 가능해졌다. 65세 이상 보훈가족으로 무주택자이면서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다면 임대아파트를 지원받아 보훈원 부설 보훈복지타운에서 생활할 수 있다. 아파트 7개 동 452세대로 이루어진 이곳에는 독신 및 부부세대가 거주 중이다. “보훈원에서는 보훈병원 방문 시 주 4회 버스 차량 지원은 물론 계절에 맞춰 효도관광 나들이가 진행됩니다. 체력관리와 여가선용을 위해 게이트볼장, 탁구장, 헬스장 등 체육시설과 각종 프로그램실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훈가족의 연금관리 등 금융서비스 편의를 위해서 보훈원 부설 우체국을 운영하고 있어요. 또한, 사망한 분들의 사후 예우를 위해 장례식장부터 안장 서비스까지 책임지며 매년 추모제도 지내고 있습니다. 입소에서 사후관리까지 이르는 관리시스템은 모두 무상으로 운영됩니다.” 어르신들이 연로하시다 보니 보훈원에서는 항상 응급상황에 대한 대비가 이뤄진다. 정인채 보훈원장은 “직원들이 밤새 편안하게 잠을 자지도, 휴가 한번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르신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함께 한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동안 보훈원에 근무하며 어르신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수차례 반복했지만, 여전히 이별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직원들은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며 친근하게 다가서려 노력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어르신들과의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은 자주 보지 못하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일 것이다. 직원들은 손을 잡아 드리고 책도 읽어 드리면서 어르신의 말벗이 되려고 노력한다. 지난 60년 동안 보훈가족들이 의식주의 불편함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온 보훈원. 이곳에서 직원들은 오늘도 어떻게 하면 어르신들이 계시는 동안 좀 더 안락하고 건강하게 지내실 수 있는지, 이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