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역사와 푸른 바닷속으로강원도 고성 문암해변 능파대 달홀. 고성의 옛 지명이다. ‘높은 산’과 ‘성’을 뜻하는 이름에서 이미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느껴진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호수, 고즈넉한 마을이 어우러져 여름의 청량함을 더하는 고성으로 향한다. 긴 해안가를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 여름에도 은근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원도의 최북단, 동해안 드라이브의 끝자락에 고성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아 한여름 휴가철에도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67km의 길고 긴 해안가가 있어 쉬어가는 곳마다 탁 트인 해변과 기암괴석의 절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송림 속 호수와 바다가 만나는 곳인 화진포에서는 옛 권력자들이 즐겨 찾았던 휴양지 풍경 그대로를 만날 수 있다. 이승만, 이기붕, 김일성 등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의 별장이 모여 있으니 그 비경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승만 별장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별장으로 이용하다가 이후 철거되었던 것을 일부 유품과 역사적인 자료를 추가하여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했다. 1920년 지어진 외국인 선교사 주택을 별장으로 사용한 이기붕 별장은 휴전 후 이부통령 가족이 단출하게 머물던 곳이다. 김일성 별장은 6·25전쟁 이전에 김일성과 그의 가족이 여름휴가를 보낸 적이 있어 알려진 이름이다. 금강소나무 숲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이 건물은 앞쪽을 중세 유럽의 입처럼 둥글게 만들어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린다. ‘해당화가 꽃 피는 나루터’라는 고운 뜻의 화진포에는 이렇게 해방과 6·25전쟁을 잇는 정치적 격변기의 가슴 아픈 기록들이 남아 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화진포해변 외에도 송지호 해변, 거진해변, 아야진해변, 청간리해변 등 무수히 많은 해수욕장이 즐비한 고성의 바다는 해외 여느 휴양지 못지않은 밝은 물빛을 자랑한다. 어딜 가든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던가’ 감탄이 나온다. 요즘 SNS에서 포토존으로 인기 있는 곳은 문암해변에 있는 능파대. 작년 겨울 BTS가 이곳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분위기의 화보를 촬영한 이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송송 구멍 뚫린 바위가 장관을 이루는데 염분을 머금은 파도가 이런 벌집 모양의 능파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독특한 바위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질 수 있는 만큼, 인생샷 남기려고 위험하게 오르지는 말자. 험난해 보이는 바윗길을 조심스레 걸으며 화강암 사이로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과 대자연의 손길을 오롯이 느껴보면 좋겠다.
항일독립에 앞장선 천년고찰 건봉사 해변의 휴식을 즐겼다면 계곡이 있는 사찰, 건봉사로 향해보자.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부처의 진짜 몸에서 나온 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유명한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탈취해 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되찾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약 6,000여 명의 승병을 조직하고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건봉사 스님들은 기꺼이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봉림학교를 지어 인재를 양성했으며, 만해 선생은 이곳에서 수행하며 ‘용운’이란 법명을 받았다. 건봉사 입구 바로 왼쪽에는 한용운 기념관과 사명당 승병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고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가 1994년부터 복원 공사를 하며 천천히 옛 모습을 되찾는 중이다.
별 헤는 시인의 고향 같은 '왕곡마을' 북녘땅과 가까워 전쟁의 흔적을 품고 있는 고성에서 한국전쟁의 포화를 기적처럼 피해간 마을이 있다. 600년 전통이 이어지는 왕곡마을이다. 왕곡마을은 고려 말에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낙향한 함씨 가문이 은거하던 마을 이었다. 조선 초 이래 강릉 최씨도 이 마을로 합류해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을 감싼 다섯 개의 봉우리 덕분에 한 번도 전쟁에 휘말린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처럼 고요했던 마을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 그대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방식으로 지은 기와집과 초가집 50여 채가 마을 안에 아기자기하게 자리를 잡았다. 여행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영화 속 동주의 집으로 등장한 ‘큰상나말집’이다. 너른 마당에서 윤동주가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던 곳으로 영화의 무대는 북간도 용정이지만 실제 그곳과 닮은 왕곡마을에서 촬영됐다. 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에 동주와 몽규가 잡지를 만들고 시를 읽던 아지트 왕곡정미소와 그네도 보인다. 영화 촬영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니 지나친 사진촬영은 삼가자. 대신 고즈넉하면서도 특별한 왕곡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며 윤동주의 시처럼 ‘별 헤는 밤’을 보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