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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모네에게 색과 빛을 앗아간 질병백내장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인상주의의 창시자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상을 똑같이 묘사하는 기존 그림과 달리, 빛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해 당대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86년의 생애 동안 60년 이상 줄기차게 그림을 그린 모네가 남긴 유화 작품 수는 대략 2,000여 점.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그림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모네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고, 온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시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백내장인상파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림 <인상, 해돋이> 1872
빛에 매료된 화가, 모네
미술사를 깊게 공부하지 않아도 '인상주의'라는 단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 어떤 대상을 보고 화가가 느낀 주관적인 인상대로 그림을 그렸던 예술 화풍을 뜻한다. 이 화풍은 1874년 파리의 한 전시에서 탄생한다. 기존의 보수적인 살롱을 거부한 미술계의 이단아들이 전시를 연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에 사용됐던 원근법, 구도, 채색 등의 회화 기법이 사라지고 강렬한 색상과 거친 붓질로 그리다 만 듯해 보이는 작품들만 가득했다. 그 중심에 바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가 있었다. 당시 이 전시를 보러 왔던 한 미술 평론가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 날로 먹는 장인 정신이 참으로 인상 깊다'라고 잡지에 기고한다. 평론가가 말한 인상주의란 그들의 작품에는 인상만 있고 솜씨나 의미는 없다는 조롱이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이단아들은 오히려 악평에서 말을 따와 스스로를 인상파라고 부르며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이후에도 정확한 형태와 사실적 묘사에 공을 들이던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풍경 속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을 그리려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연마해 나갔다. 모네는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빛을 가장 집요하게 관찰했으며,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화풍을 바꿀 때도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다. 빛과 대기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산으로, 강으로 캔버스를 들고 빛이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찾아다녔고 자신의 화폭 속에 담았다.
백내장<파라솔을 든 여인> 1875
모네의 백내장에 영향을 준 것은?
인상파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모네는 정원이 딸린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그의 유명한 작품, 수련 연작도 지베르니에 있는 자택 정원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수련>의및과 색채를 1926년 숨을 거둘 때까지 27년에 걸쳐 무려 250여 점의 연작으로 그렸다.

하루종일 빛을 직접 보며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 갔던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된다. '빛의 화가'에게 가혹한 질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생활을 살펴보면 백내장에 걸릴 가능성이 농후함을 알 수 있다. 후천성 백내장의 가장 큰 원인은 노화다. 나이를 먹을수록 백내장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외에도 흡연, 야외활동, 자외선은 백내장을 유발할 확률을 높인다. 모네는 나이도 지긋한 데다 평생 담배를 피웠고 빛을 탐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야외 작업을 해왔다. 당시에도 자외선을 차단할 선글라스는 있었지만 자연 그대로를 캔버스에 담으려던 그가 선글라스를 끼고 작업했을 리 만무하다. 백내장 증상은 악화했고 모네는 지독한 절망을 느끼며 자신감을 잃었다. 1918년, 모네는 더 이상 색을 정확히 구별하기가 힘들고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기가 힘들다고 고백한다.
백내장<지베르니 석양의 건초더미> 1891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네의 작품 중 최고가인 약 960억 원을 기록했다.
모네의 화풍을 바꿔 놓은 백내장
모네가 백내장에 걸린 후 그린 작품들은 보면 이전의 색감과 두께를 완전히 무시한다. 서로 다른 시기에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모네는 밝은 곳에서 색을 구별하는 것을 더 어려워했다. 실제로 백내장 환자 중에서는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시력이 더 좋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밝은 곳에서는 동공의 크기가 줄어 백내장에 의해 빛이 차단당하는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백내장 환자 중에는 빛의 전달 폭이 바뀌어 작은 글씨가 잘 보이기 시작한다는 이도 있다.
백내장

당시 안과 의사들은 모네에게 수술을 권했는데, 이는 적절한 조언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내장은 수술 이외에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다. 투명성을 잃은 수정체를 제거하고 이를 대체할 렌즈를 넣거나 안경을 착용해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1920년쯤에는 백내장 수술의 성공률이 낮을 때였고 그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 몇 명이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그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네는 수술하는 것을 몹시 망설였다.
백내장1926년 <작업실에 있는 모네>
만약 모네가 요즘 한국에서 안과 수술을 받았다면?
부산보훈병원 안과 이미현 전문의는 "백내장은 방치하면 실명에 이를 수도 있지만, 수술을 통해 드라마틱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설명하는 백내장 수술은 혼탁한 수정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본인의 도수에 맞는 인공수정체를 넣어주는 방법. 최근에는 2~3mm의 작은 절개창을 통해 소 기구를 안구 내에 삽입하고 초음파로 혼탁한 수정체를 잘게 부수어서 제거하는 초음파 수정체 유화술을 많이 시행한다. 최소한의 절개로 수술 후 난시 변화가 적고 수술 시간이 짧으며 회복도 빠르다.
당시에는 인공수정체가 없던 시기라 수술 후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두꺼운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모네는 '안경을 쓰나 안 쓰나 잘 안 보인다'고 불평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바로 후낭 혼탁이었다. 후낭은 수정체를 감싸는 공간으로 이 부위가 탁해지면 수정체를 제거하더라도 색감과 시력에 문제가 남는다. 모네는 후낭 혼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안경을 교체해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간혹 백내장 수술 후 시력 저하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인공수정체 삽입을 위해 남겨 놓은 후낭에 혼탁이 와 다시 눈이 흐려지는 증상인 후발성 백내장은 전체 백내장 수술환자의 약 30%에서 발생한다. 이미현 전문의는 "후발성 백내장 치료 레이저(OPHTHALMIC ND-YAG LASER)를 이용해 혼탁이 발생한 후낭 부위를 치료해주면 다시 원래 시력으로 회복할 수 있고 치료 후 재발 확률이 낮아 안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백내장

백내장에도 계속된 그림 열정
모네는 색채를 구별하기 어려워 낙담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 후 정상적으로 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백내장을 심하게 앓던 시절의 그림을 찢고 불태웠다고 한다. 우리가 백내장을 앓던 시기의 모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며느리와 친구들이 모네의 그림을 여기저기 숨겨서 보관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모네가 백내장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모네가 백내장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그림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그의 삶 일부를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1926년 86세의 나이로 클로드 모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오랜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는 관 위에 드리워진 검은 천을 치우며 '모네에게 검은색은 없다'고 외쳤다. 그리고 색으로 가득 찬 꽃무늬 천으로 관을 덮었다. '빛의 화가', '인상파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며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연 클로드 모네. 1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과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참고자료 :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 이지환 저, <가슴에 피어나는 꽃> 70호사진출처 : WikiArt, https://namu.wiki/w/클로드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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