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물러가는 추위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곧 봄이다. 3월을 맞이할 때쯤이면 생각난다. 오늘의 이 평온한 풍경마저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로 다져진 것임을. 기도 안성에서 이 땅에 봄을 러온 분들을 만났다. ‘편안한 마을’, ‘안전한 성곽’이라는 뜻의 안성은 예로부터 곳곳에 호수와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사람을 길러냈다. 조선 시대에는 동서와 남북으로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상업의 중심지로서 전국각지에서 몰려드는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오히려 서울 장보다 질 좋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특히 안성의 유기(놋그릇)는 튼튼하고 질이 좋아 콧방귀 좀 뀐다는 집안은 안성에서 유기를 직접 맞춰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안성맞춤’의 도시가 되었으나, 널리 알려진 이름에 비해 ‘안성 여행’은 여전히 생소하다. 치열했던 독립운동이 펼쳐진 곳이라는 것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안성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만세운동을 통해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이뤄냈던 지역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 안성 3·1운동기념관 나라를 빼앗긴 36년을 치욕의 세월이라고 부르는 건 절반밖에 안 되는 설명이다. 많은 이들이 전 생애를 걸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삶의 일부를 걸어 나라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이 세월은 항거의 세월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안성의 3·1운동은 양성 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안성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를 시작으로 안성의 독립운동가들과 마을 주민 약 3,000명은 3월 31일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일본인 상점, 고리대금업자가 상주한 건물을 습격하여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 ‘2일간의 해방’을 이뤄냈다. 항쟁은 4월 3일까지 이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수십 명이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치열했던 독립운동으로 불리며 3·1운동 3대 실력 항쟁지로 역사에 새겨졌다. 안성 3·1운동기념관은 주민 스스로 참여해 2일간의 해방을 이뤄냈던 원곡과 양성의 4·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항쟁의 집결지였던 만세고개 일원에 안성시민의 힘으로 2001년 개관했다. 안성지역 독립운동가의 361명의 위패가 봉안된 광복사, 전시관과 기념관, 무궁화동산 등 전시관 내·외부가 주는 감동도 있지만, 일제의 만행이 더 깊은 상처로 남는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을 가두고 고문했던 감옥 모형들은 눈앞에서 더욱 잔인하고 처참하게 느껴진다. 독립을 위해 어떤 보상도 없이 스러진 생애를 마주하며 봄날은 그냥 오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장인의 혼이 살아있는 예술의 도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안성은 자세히, 그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토란 같은 볼거리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내놓는다. 안성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모아 놓은 곳은 ‘안성맞춤랜드’다. 남사당공연장과 천문과학관, 캠핑장, 박두진문학관 등이 드넓은 대지에 펼쳐져 있다. 아쉽게도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의 공연은 잠정 중단되었지만, 코로나 시국이 끝나면 챙겨봐야 할 신명 나는 공연으로 꼽힌다.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안성에서 나고 자란 박두진 시인의 작품과 그가 애정을 쏟아 수집했던 ‘수석’을 함께 보는 이색 전시도 흥미롭다.
안성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다채롭게 담겨 있는 곳은 ‘안성맞춤박물관’이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입구에 세워져 이 고장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학창시절’을 테마로 안성의 근현대 풍경을 담은 기획전을 열고 있다. 올해 6월 말일까지니 이곳에서 학창시절과 과거 생활을 추억하는 시간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상설 전시실에는 안성 유기의 역사와 제작과정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유기는 살균 작용이 뛰어나 대장균 등 세균 번식을 억제한다. 음식을 담으면 발생하는 미네랄 성분도 인체에 유익하고 유기의 보온 기능 덕분에 뜨듯한 밥맛이 오래간다. 요즘은 전통의 새로운 매력에 빠진 젊은 층이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5일장이 열리는 안성중앙시장 근처 ‘안성맞춤유기공방’은 3대째 장인정신으로 안성 유기의 맥을 지켜가고 있는 곳으로 전시장에서는 장인의 작품을 구경하고 구매할 수 있다. 식기류, 반상기, 제기, 장식품 등 다양한 유기제품을 생산한다. 호수에서 즐기는 이색 데이트 자연 속 평화로운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금광 호수 드라이브가 좋겠다. 하늘을 닮은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기 좋은 카페가 많다. 호수선착장에서 벨을 누르면 보트 한 척이 소환돼 손님을 실어 나르는 식당도 있다. 생각이 많은 날은 호수 주변을 쭉 두른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시름은 덜어지고 반짝이는 은빛 호수 물결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