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입사하는 수많은 신입사원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임원의 자리에 오른다. 남다른 성취에는 어떤 일을 맡든 자신의 역량을 넓히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89년 공단에 입사하여 33년 만에 임원의 자리에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는 이상진 신임 사업이사를 만났다. 그가 촘촘히 쌓아온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 앞으로 펼쳐나갈 비전을 들어본다.
Q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과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989년 6월 1일 공단에 입사하여 33년째 되는 해, 같은 날에 사업이사로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어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입사 당시 품었던 마음을 되새기며 공단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힘을 쏟겠습니다. 축하와 격려를 보내주신 선․후배 임직원과 동료 여러분께도 감사 말씀드리며, 기대에 부응하도록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Q 올해는 공단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목표, 그리고 사업이사로서 갖고 계신 미래 비전은 무엇인가요? 1981년 공단설립 당시 50대였던 6·25 참전용사와 30대 월남 참전용사분들이 이제는 고령에 접어들어 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분들과 가족들의 의료와 복지를 위해 설립된 공단의 지속적인 역할에 대해 직원들의 불안감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식이 곧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나라의 근간이자 국가라는 공동체를 지속하는 힘인 보훈의 대상을 국가사회 기여자로 확대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으며, 우리가 지난 40년 동안 축적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데이터와 인프라는 고령 환자에 대한 의료서비스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방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중앙보훈병원이 공식적으로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받고, 이를 계기로 특수 공공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도 공단 미래 비전이 한가지 예라 생각합니다. 제가 현재 국립 소방병원 건립자문위원을 맡아 활동하는 것도 이러한 공단의 목적성과 방향에 일조하기 위함입니다. 비전이란 미래의 꿈을 내 눈앞으로 당겨놓고, 나의 현실과 꿈 사이의 간극을 정확하게 인식해서 전력 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의식이 강할수록 목표에 대한 의지가 강해지고 계획이 정확해지죠. 힘을 합쳐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나간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Q 그간 역할과 경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가지를 꼽아 주신다면? ‘첫 번째 역할’에 대한 애정과 기억이 큽니다. 89년 6월 1일 자로 수익사업단에 발령받아 간 곳이 성남에 있는 합성수지사업소였는데, 입사 두 달 후부터 현장 업무를 맡아 전국에 있는 거래처를 제가 도맡아 다니게 됐어요. 단위농협을 상대로 하다 보니 외근 날짜가 1년에 180여 일이 될 정도였죠.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에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실전에서 업무를 익히던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가장 깊게 남아있어요. 만 스물여섯,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시절에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다녔던 저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고요. 돌이켜보면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했던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쉽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몰입하다 보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좌절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그 역경을 하나하나 이겨내면 나에게 경력이 되고 자산이 됩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내 삶도 조금씩 완성이 되어가는 거죠.
"역경을 하나하나 이겨내면 경력이 되고 자산이 됩니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Q 말씀에서 ‘커리어의 승패는 과정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업무역량을 키우기 위한 노력, 프로가 되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다양한 업무영역을 경험하면서 ‘보직이 곧 기회’라고 생각해왔어요. 일에 대한 전문성은 결국 회사가 만들어 준다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있었기에 주어진 임무를 통해 저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책임감이라는 전제가 있어야겠죠. 제가 수익사업단에 8년간 있다가 개원 멤버로 대전보훈병원에 갔을 당시 전문직들과의 대화에서 소통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 있겠지만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택했어요. 지역 대학에 개설된 병원관리학 석사 과정을 밟아보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당시에는 교육비가 지원되지 않던 시절이라 자비를 들여 수요일 저녁에 강의를 듣고 주말에 부족한 업무와 공부에 매진해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저는 지금껏 너무 먼 계획이나 부담스러운 목표는 세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취가 또 다른 목표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성실히 임했어요. 프로의 길이라는 것도 결국 자기 일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여 더 잘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훈련하는 일이 아닐까요?
Q 워커홀릭이란 얘기도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끝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집요하리만큼 파고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거리를 집에도 많이 가져갔으니 지금 시선으로는 워커홀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사무업무가 자동화되고 데이터가 축적된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많은 데이터를 자료에서 직접 추출해야 했어요.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여러 장을 만들려면 먹지를 대고 생산해내야 했으니 물리적인 시간을 주말이나 가정에서 빌려야만 했죠. 지금은 넘쳐나는 데이터 속에서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후배들에게는 시행착오를 겪기 전에 사내나 사외의 사례, 또는 전문적 논문 등을 참고하면 충분히 더 잘할 방법이 많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론 등에 대해 관심이 넓어지고 그것을 익히는 과정 자체가 자신의 실력이고, 역량이라는 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Q 마음에 안 드는 상사나 부하가 있을 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아마도 생각의 차이에서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다른 만큼 우선 차이를 인정해야겠지요. 저는 그럴 때 상사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각을 넓혀 생각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상사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이왕이면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상사가 아니기를 바라고요(웃음). 첫인상이 차갑고 깐깐해 보인다고 하는데,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부담 없고 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저는 누구를 대하든 존중하는 마음을 기본 바탕에 두고 있어요. 후배의 실수를 지적할 때도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습니다. 따갑게 들릴 수 있겠지만 가슴에 남을 용어는 쓰지 않으려 하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대안을 주고 해결방안을 같이 제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선배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임기가 끝났을 때 어떤 사업이사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공단이 안고 있는 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직원들의 고민과 염려를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소통과 협력의 분위기 속에서 공단의 혁신과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임원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임 이상진 사업이사는 1989년 공단에 입사해 중앙보훈병원 행정부원장, 대전보훈병원 운영실장, 본사 경영혁신실장, 의료지원실장 등의 주요보직을 역임했다. 보훈·의료·복지 사업에 대한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으며 지난 6월 공단의 새로운 사업이사로 임명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