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현 당진시) 대호지 정미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4월 2일 면장이었던 이인정 선생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도로 정리를 지시하는 공문을 작성하였다. 다음날 직원 송재만 선생이 8개 마을에 공문을 직접 통지했고, 훈장 한운석 선생이 애국가를 직접 작사해 인쇄했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전, 대호지면사무소에 주민 약 5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정미면의 천의 시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0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일경의 탄압에 저항하여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제의 탄압으로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이인정, 한운석 선생은 징역 1년 형을, 송재만 선생은 5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네 명의 선생은 미주지역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끈 주역들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과 외교활동으로 독립을 지원했다. 대미외교를 활성화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1944년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사무소에서 김원용, 전경무 선생은 대외교섭과 외교활동을 주도했다. 동시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 운동도 활발히 진행됐다. 심영신 선생은 미국 육군 소속 건축부에서 사업하며 본인의 월급 전액을 지원하는 등 열성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민함나 선생은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호놀룰루에서의 독립자금 모금에 매진했다. 이들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 협력을 통해 자주적인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촉진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임시정부로 결집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달의 6·25 전쟁영웅
3월 임택순 공군 대위(1930.12.31. ~ 1953.3.6.) 상훈: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1953) 1951년 7월 10일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정찰 비행대대와 교육비행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3년 1월 5일에 제10전투비행단으로 전속되었다. 같은 해 3월 6일, 동부전선의 요충지로 2년간 격전이 거듭되던 강원도 고성 351고지의 방어를 돕기 위해 12번째 출격에 나섰다가 적군의 대공포탄에 우측 날개가 피탄 되었다. 이에 전방 공중통제관은 신속한 탈출을 권유했으나 그는 그대로 적의 보급소가 위치한 계곡으로 돌진하여 전사하였다.
4월 김용호 해병대 중위(1929.9.16. ~ 1952.11.1.) 상훈: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1953) 1952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경기도 장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해병대 1연대 11중대 3소대장으로 보직됐다. 당시 장단지구는 서울에서 불과 25마일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0월 31일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장단지구 사천강 지역으로 밀려들자 75명의 병력으로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 115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70여 명의 소대원이 전사한 것을 확인한 그는 부하 해병들이 잠든 고지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