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안동의진 좌익장으로 활동한 바 있는 최세윤 선생은 1908년 산남의진의 제3대 의병장을 맡아 경북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5년 3월로 감형됐다. 정원집 선생은 군자금을 조달하다 체포돼 1907년 전남 지도로 유배됐으나 이듬해에 탈출해 전라도 서부에서 활동하던 대동창의단에 들어가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일본군 병참소(나주)를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으나 총에 맞아 전사했다. 김영백 선생은 1907년 고향 장성에서 의병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에 올랐다. 전라남북도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의병부대 탄압이 계속되자 1909년 자수, 이듬해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미국 해병 중위 로페즈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파병에 지원한 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해 진두에 선 로페즈는 용감하게 사다리에 올라 방파제를 넘었다. 그리고 북한군 벙커에 수류탄을 던지려던 찰나, 적이 쏜 총탄에 맞고 넘어지며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을 기어 겨우 수류탄을 집어 들긴 했으나 부상으로 던질 수 없자 그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로페즈는 해안 방벽 사다리를 넘는 사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미국(명예훈장, 1951)과 한국(태극무공훈장, 2023)은 그에게 최고의 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아일랜드 콜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인 세 사람은 1933~1935년, 내한해 제주의 천주교성당에서 사제로 시무했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연일 일본군의 승승장구만을 보도하자 세 신부는 이를 과장·허위보도라고 주민들에게 알리고 일본군의 패전 소식과 향후 일본의 패망을 전망했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일본은 1941년 이들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하고 이듬해 기소했다. 이들은 5년 징역형과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거나 연금 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석방됐다. 일제의 승승장구만이 보도되던 암울한 시대에 세 신부의 사실 전파와 일본 패망의 전망은 주민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다.
이성덕 중위는 1952년 1월 육군소위로 임관 후 같은 해 10월,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제11중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이성덕 중위(당시 소위)는 백마고지 북쪽 전초진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화랑고지’에서 수차례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백마고지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지인 화랑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증원한 중공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했고 소대원들을 지휘하며 고지를 사수하던 이성덕 중위는 적의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로도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주인이 바뀌기도 했으나, 10월 15일 제28연대가 395고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