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만나는독립운동 이야기 광복 79주년을 맞아 종로에 보물처럼 숨겨진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본다. 백범 김구 선생의 정신이 깃든 ‘경교장’ 한양도성의 서쪽 성문이었던 돈의문 옛터에 자리한 강북삼성병원에는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석조건물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건물의 이름은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 서거할 때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이자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청사다. 충칭의 임시정부청사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듣고 환국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주 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이 모든 활동은 경교장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소용돌이치던 복잡한 정치 환경과 맞물려 임시정부 요원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초라하게 환국해야 했던 쓰라린 현실, 그리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백범의 생활과 애국의 흔적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교장은 김구 선생 서거 후 사택과 대사관, 병원 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0년에 이르러 복원이 시작되었다. 2층 집무실 복도 창문은 서거 당시 총탄 자국을 재현해 당시의 아픔을 그대로 전한다. 여기서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이었던 안두희의 총탄에 맞은 선생은 그대로 숨을 거두게 된다. 김구 선생의 유품이 전시된 지하 공간에는 서거 당시 입었던 혈의와 얼굴을 본뜬 석고 마스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응급처치를 위해 의료진이 급하게 가위로 옷을 자른 흔적과 검붉은 혈흔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조국 독립과 자신을 맞바꾼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환하게 웃고 있는 김구 선생의 생전 모습을 눈에 담으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역사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푸른 눈의 독립영웅이 살던 집, ‘딜쿠샤’ 경교장을 빠져나와 바로 뒤편 한양도성 성곽길로 향한다. ‘딜쿠샤’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행촌동 언덕 위 붉은 벽돌집 앞에 서게 된다. 딜쿠샤는 뜨거웠던 3·1운동과 일제 만행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전 세계에 알리며 한국에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킨 미국 출신의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가 살았던 곳이다. 부부는 커다란 은행나무 옆에 집을 짓고 ‘기쁜 마음의 궁전’ 이라는 뜻의 딜쿠샤로 이름을 정했다. 광산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입국한 앨버트 테일러는 동양의 여러 나라를 순회공연 중이던 연극배우 메리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3·1운동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 브루스가 태어나는데, 앨버트는 막 출산한 아내와 아들을 보러 왔다가 침대 속 독립선언문을 발견한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간호사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숨겨둔 것이었다. 이를 알아챈 앨버트가 즉시 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문을 미국으로 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진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에 고초를 겪고 결국 추방당한 부부는 1948년 앨버트가 숨을 거둔 후에야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늘 다시 돌아오길 바랐던 남편의 바람대로 메리는 그의 유해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치했다. 가혹했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운명을 같이하면서도 행복했던 가족의 기억을 담은 딜쿠샤. 그들의 안식처는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벗집’에서 만난 뜨겁고도 선명한 이름 ‘이회영 기념관’이 지난 7월, 남산 자락에서 인왕산 아래 사직동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딜쿠샤와는 지척이다. 새로운 기념관에는 ‘벗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회영 선생의 아호 우당(友堂)을 풀어쓴 말이다. 선생은 여생을 벗들을 위해 살았고, 누구에게나 위아래가 없는 사람이었으며 한치도 군림하는 법이 없는 다감한 벗이었다고 한다. 응접실 벽면에서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을 만난다. 신민회 설립의 주역이었고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형제 가운데서 살아서 환국한 이는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다른 다섯 형제는 항일독립투쟁 전선에서 전 재산과 목숨마저 바치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회영 선생이 남긴 초상 사진은 단 한 장뿐. 기록은 곧 자신뿐 아니라 동지들의 죽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다른 숱한 항일운동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역사를 잊지 않는 이들의 관심과 발걸음이 이어지는 진정한 벗집을 기대해본다. 03원형을 복원한 딜쿠샤 외관 , 04 사직동에 새롭게 문을 연 이회영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