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흔적을 찾아서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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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경상북도 안동
경상북도 안동낙동강 흐름처럼 유려한 고장. 안동에 새겨진 한국 정신문화의 역사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안동의 낮과 밤, 하회마을과 월영교
양반의 고장, 안동 여행은 하회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풍산 류씨 집성촌으로 물이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른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하회’다. 낙동강 위에 피어난 연꽃의 형상과 닮아 최고의 길지로도 꼽힌다. 그래서인지 마을은 유교문화와 민중문화를 함께 발전시키며 600년 유구한 세월을 지켜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간 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을로 이름을 떨쳤으나 우리에겐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면서 누구나 아는 익숙한 풍경이다.
마을을 걷는 코스는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돌담길이 안내해주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본다. 흙담이 정겨운 고샅길은 마을의 속내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한 정겨움이 있고 이 흙담장을 따라 돌다 보면 양반집과 초가집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강 건너 부용대에 오르면 하회마을을 감싸고
있는 낙동강과 그 속에 강과 산의 보호를 받으며 비밀스럽게 들어선 하회마을의 자태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안동에서 야경까지 즐기려면 여행은 1박 2일이 여유롭다. 어둠이 내린 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안동댐 아랫자락에 놓인 월영교다. 총길이 387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로 2003년 처음 개통되었고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에서 다리 위 정자인 월영정을 옮겨오면서 야경명소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달빛 아래 월영교를 끝까지 걸어가는 연인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뻔해도 밤 산책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 문(Moon)보트를 타고 월영교 아래 낙동강을 유유히 나아가는 것도 한밤의 낭만을 더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이 땅에 봄을 불러온 이들
안동을 찾은 3월의 마지막 날. 작년 같으면 벚꽃 비가 떨어질 시기지만 꽃샘추위 탓에 꽃을 가득
머금고 있는 봉오리만 야속하게 애를 태운다. 천천히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엄혹했던 시절, 이 땅에
자유와 희망의 씨앗을 뿌린 선조들을 만나본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시인 이육사가 조국의 광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쓴 시 <광야>의 한 부분이다. 이육사는 여름이면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마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
이며 ‘이육사’는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수인번호였던 264를 따서 만든 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는 그의 생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물일곱부터 마흔이 되기까지 17번이나 감옥에 갇혔던 그는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으며 1944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그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가 열매를 맺어 이 땅에 따사로운 봄을 선사했음을 기억하자. 안동시 도산면, 그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이육사문학관에서 불꽃 같았던 그가 남긴 생의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가 남긴 아픈 흔적, 임청각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이가 여기 또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찍부터 의병 활동에 뛰어들었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에 전력을 다할 것을 결심한다. 가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준비하고, 노비 문서는 불살라 종들을 해방시켰다. 선생을 포함해 그의 일가족, 나아가 후손까지도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으니 집안 전체가 나라에 헌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북도 안동

1911년 52세의 나이에 5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선생은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초석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키워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굵직한 업적을 이뤄내며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이런 선생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일제는 500년 역사가 담긴 선생의 생가이자 3대가 독립 투쟁에 나선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의 맥을 끊고자 이곳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로를 개통해 대문간과 행랑채 등 임청각의 절반인 50여 칸을 파괴했다. 강을 건너면서 바라보던 웅장한 자태도 철로에 가로막혀 볼 수 없게 됐다. 3월, 임청각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만난 모습은 끊어진 철길과 공사 중인 현장이었다. 다행히 안동시가 본격적인 복원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철길을 철거하고, 없어진 가옥이 복원되고, 낙동강 옛 나루터도 재현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반갑기만 하다. 수많은 독립열사가 묵었던 군자정에 잠시 앉아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고택의 정취를 느껴본다. 1932년 길림성에서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싣고 가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 선생의 장엄한 생애가 그려지는 듯하다.

경상북도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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