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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이달의 6·25 전쟁영웅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6·25 전쟁영웅
이들은 일본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뒤,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활동,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쳤다. 옥살이 도중인 1926년7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유해는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후세 다쓰지 선생은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의 변호를 맡으며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했고, 국가 전복 모의 혐의를 받은 박열·가네코 부부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법정에서 싸웠다. 일제 패망 후에도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서거했다.
5월, 이달의 6.25 전쟁영웅
이달의 6·25 전쟁영웅
1950년 7월 군종 신부로 파병돼 활동했다. 그가 속한 부대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에게 고립되어 후퇴하자 자발적으로 잔류했다. 그 후 몇 차례나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상자 수습을 이유로 거절, 결국 1950년 11월 중공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잡혀 평안북도 벽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수용소에서도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부상자들을 간호하는 것은 물론, 야간에 목숨을 걸고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찾아 가져다주는 등 헌신적으로 포로들을 돌보던 카폰 신부는 오랜 수감 생활과 부상, 혹독한 추위 등으로 1951년 5월 23일 포로수용소에서 생을 달리했다.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6·25 전쟁영웅
1907년 8월 일제가 강제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오덕홍 선생은 1909년 8월 소규모 유격부대를 창설해 나주 등지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고 배신자를 처단하는 등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달성했다. 김일언 선생은 1907년 4월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우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정용기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 총대장직을 이어받은 정환직 의병장, 최세윤 의병장 휘하에서도 활동하였다. 정래의 선생은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 항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순국한 의병을 추모하는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하여 영천 등 영남 일대에서 활동했다.
6월, 이달의 6.25 전쟁영웅
이달의 6·25 전쟁영웅
1953년 1월 육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통신 가설 장교로 임명됐다. 같은 해 7월 13일 중공군은 정전 협상에서 유리한 지형과 작전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부전선에 5개 군단을 투입해 최후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백병전이 벌어지던 중 1대대는 통신선이 단절돼 철수계획이 변경된 사실이 전달되지 않아 고립 위기에 처했다. 이에 소대장이었던 그는 긴급가설 결사조를 편성해 대원 10명과 함께 끊어진 유선 통신선 복구에 나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적의 박격포탄이 터져 크게 다쳤고 ‘생명선을 연결하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조원들은 목숨을 걸고 통신선을 연결했고 철수작전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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