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선생은 1938년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참가, 1941년 12월 호가장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의사들이다. 이들이 활동한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에 창설된 중국 만리장성 이남의 한국인 최초 군사조직으로, 중국 정부군과 함께 항일전을 수행했다.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던 화북지대 제2대원들은 중국 허베이성 호가장 마을에서 숙영 중 일본군 및 협력세력에 포위당하게 된다. 이때 제2대 분대장 손일봉과 대원 최철호, 박철동, 이정순은 죽음을 각오하고 후위대에 자원하여 다른 대원들이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사격하며 끝까지 싸웠다. 이들의 헌신으로 화북지대 대원들은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후위대에 남은 이들은 일본군의 집중포화 끝에 전사하였다.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가서 치른 최초의 대적 전투이자 가장 치열하게 싸운 혈전으로 후일 항일광복전선에 귀감이 되는 선례를 남겼다.
세 명의 선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의 실행자와 언론사 책임자들로 암울한 시기에 민족정신을 새롭게 일깨운 역할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인 손기정의 우승마저 일본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민족지 언론으로써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일장기를 지웠던 동아일보 체육부장 이길용 선생은 고문을 당한 뒤 강제로 기자직에서 면직되었고,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 선생은 이후 민족지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1937년 6월까지 10개월 동안 총독부로부터 동아일보 정간 협박에 맞섰다.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부임해 이끌던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에 의해 복간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은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증명하며 광복의 한 여정으로 남게 되었다.
이달의 6·25 전쟁영웅
노르웨이 정부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의 요청에 따라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을 파견했다. 3년 3개월 동안 의사 80명, 치과의사 5명, 간호사 33명 등 연인원 623명이 부상당한 장병들의 치료는 물론 민간인 진료에도 최선을 다했다. 특히 외과반은 참전 기간에 총 9,600여 회 수술했고, 1일 64회 수술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병원이 철수한 이후에도 스웨덴, 덴마크 정부와 협조하여 국립의료원의 설립과 운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대한민국의 의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일등상사였던 그는 6·25전쟁 초기 당시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전투에 특공대 제3조장으로 참여했다. 공격목표에 가까이 접근한 특공대는 은폐된 적 전차 5대를 확인 후 공격을 감행하여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활약으로 적의 위협에서 벗어난 제12연대 3대대는 369고지 일대에 숨어있던 적을 공격하여 수세로 몰았고, 제2대대도 201고지로 무사히 진출하여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