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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나는독립운동가의 흔적
독립운동가의 흔적
서울을 대표하는 고즈넉한 한옥마을 북촌. 데이트코스로 인기 있는 이곳이 일제강점기, 우리 고유의 주거 양식과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 주거지’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독립운동가의 흔적
북촌 한옥마을에 숨겨진 사연
북촌은 서울시 종로구 계동과 가회동 일원의 한옥밀집지역을 뜻한다.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 동네라서 북촌이라 불리었으며, 과거 궁궐에 인접해 양반들이나 고위관직들이 거주하던 부촌이기도 하다. 지금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과 빈티지한 골목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1920년대 북촌 한옥마을은 혁신적인 건축의 본보기였다. 정통 한옥과 달리 북촌의 한옥엔 수도가 들어왔고 주방에는 타일이 깔렸다. 집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가격이 낮아 서민들도 거주할 수 있었다. 지금 기준에선 잘 만들어진 중소형 아파트였던 셈. 마케팅 방식도 근대적이어서 1929년 일간지에 ‘집을 팝니다’라는 제목의 집중적인 광고를 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아라”
1920년대에 일본인들은 서울 인구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많아졌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칼잡이 ‘구동매’가 활동하던 근거지가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 즉 남촌으로 경성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이 고개를 통으로 밀어버리고 일대를 일본식 번화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거주지를 넓히기 위해 북촌 고관대작들의 소유지에 눈독을 들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가 당시 경성을 주름잡던 부동산 거물, 기농(基農) 정세권 선생이다.
선생은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 북촌에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광대한 집터를 쪼개 작은 한옥을 지었다. “사람이 살려면 집이 있어야 한다. 한옥을 지으면 일본인은 살지 못하고 조선인이 살 수 있다. 사람 수가 힘이다.” 이런 덕분에 당시 경성 시민들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 한옥을 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인 생활권과 분리되면서 조선은 고유의 생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국권은 침탈되었으나 일상은 지켜내고 있다는 위로이자 자긍심이기도 했다.
서울 전체 주택 거래의 35%를 차지하며 ‘건축왕’으로 불렸던 정세권 선생은 또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자 든든한 재정 후원자였다. 그의 신념은 조선집(한옥) 짓기, 조선물산운동, 신간회 지원 등을 거쳐 한글에 이르렀다. 조선어사전 편찬에 들어간 조선어학회를 위해 북촌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회관을 지어 기증했다. 조선어학회는 이곳에서 조선어 표준어를 확정하였고, ‘조선어대사전’에 들어갈 16만의 어휘 뜻풀이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눈엣가시가 된 선생은 1942년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이듬해에는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하게 된다. 민족 자본가로 시대를 앞선 ‘공공개발자’이자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인 그를 기억하는 공간이 올해 3월, 북촌에 마련되었다. ‘북촌한옥역사관’에서 선생의 고귀한 신념과 헌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어떨까.

독립운동가의 흔적

골목을 돌면 만나는 독립운동가들
북촌은 이어진 처마 선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좁다란 골목 도심 구경에는 도보 여행이 제격.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헌법재판소를 따라 쭉 올라가 보자. 걸음을 붙잡는 곳마다 신분과 계급, 종교와 지역을 뛰어넘은 독립운동의 흔적이 이 남아있다.
독립운동가의 흔적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북촌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서 독립선언문 작성 등 거사를 준비했고, 이들의 계획은 천도교의 손병희 등에 알려져 ‘우리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는 단합의 계기가 된다. 개신교의 남강 이승훈과 불교의 만해 한용운이 계획에 동참하여 중앙고보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회합했다.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는 ‘3·1운동 책원비’가 건립됐다.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발상지인 정독도서관 옆에는 ‘독립운동가의 길’이 조성됐다. 고종의 비밀문서를 품고 파리로 향한 김란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 김구, 관동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던 박열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과 함께 안창호, 윤봉길, 이봉창,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그라피티 작업을 통해 색다른 이미지로 창출됐다.
독립운동가의 흔적독립운동가의 흔적

조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집, 딜쿠샤
북촌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 종로구 행촌동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가 살았던 가옥, 딜쿠샤(Dilkusha)가 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 100여 년의 시간을 베일에 싸여 있던 신비로운 집 역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1897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한 광산 사업가이자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가 조선의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보도하게 된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이들 부부의 만남과 조선정착기,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딜쿠샤를 찾아 고가도로와 터널, 신축 아파트와 벽돌집이 공존하는 서울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여정도 특별한 기억이 될 것이다.

종로구 북촌 _Travel Tip_
우리나라 최초, 서울 공예박물관
독립운동가의 흔적
7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박물관이 안국역 부근에 자리 잡아 새로운 명소로 등극하고 있다. 1940년부터 하나둘씩 지어진 풍문여자고등학교 건물 5개 동을 부수지 않고 현대적으로 리모델링 해 완공했다. 시민들이 언제든지 정원에 들어와 공예가가 만든 의자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야외에서도 공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골목처럼 박물관 전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과거의 건축물이 현재의 북촌과 연결되는 문화의 힘을 느끼고 싶다면 사전 예약을 통해 방문해보자.

아는 맛이 더 무섭다! 빙수 & 빵
독립운동가의 흔적
원래는 북촌빙수였던 것이 이웃 동네 이름인 ‘삼청빙수’로 상호가 바뀌었다. 다행히 맛은 그대로다. 한옥과 놋그릇, 쏟아질 듯 수북하게 쌓인 빙수가 어우러진 여름의 맛. 팥을 좋아하지 않으면 팥 대신 빙수를 더 요청해도 된다. 2인 1빙은 필수. 먹다 보면 보기보다 양이 많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빵지순례자’들에게 인기 높은 ‘카페레이어드 안국점’은 스콘 맛집으로 통한다. 처마 아래 작은 문을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비주얼에 놀라고 홀린 듯 케이크와 스콘을 고르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심 속 스테이케이션, 보눔1957
독립운동가의 흔적
코로나19가 계속되면서 스테이케이션이 휴가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올랐다. 머무른다는 뜻을 가진 ‘Stay’와 휴가를 뜻하는 ‘Vacation’의 합성어로 한곳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것. 그렇다면 자연이 아닌,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한옥의 정취를 느끼는 휴가는 어떨까? 1957년 지어진 양옥에 한옥의 멋을 더한 호텔 ‘보눔1957’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른 세상처럼 고요한 공간이 펼쳐진다. 한옥뿐 아니라 양옥으로 이루어진 룸도 마련되어 있으니 취향에 맞게 선택해 도심 속 나만의 여유를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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