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흔적을 찾아서 HOME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인쇄
봄꽃들의 천국태안
태안
서둘러 피어난 벚꽃들이 삽시간에 져버린 올해. 꽃놀이를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면 충남 태안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른 봄 피었다가 후두두 지는 목련꽃도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요즘이 한창이다.
꽃들의 꽃길, 천리포수목원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천리포수목원에는 봄이 더디 온다. 4월 무렵에야 목련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이때부터 800여 종의 목련이 5월 초순까지 시차를 두고 피고 진다.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으로 민병갈 원장이 평생을 일군 꿈의 낙원이다. 광복 직후 미국 정보 장교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던 그는 우리나라의 자연에 심취해 귀화한 뒤, 척박했던 이곳에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식물을 수집하고 뿌리 내리도록 노력한 결과 지금은 1만 6,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특히 목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분류군을 보유한 명소로 매년 4월에 열리는 목련 축제 때에만 비밀의 화원을 개방한다.
천리포수목원에 들어서면 짭짤한 바닷냄새에 달콤한 목련 향이 실려 온다. 목련 향을 따라 해송이 늘어선 조붓한 산책로를 걷다 보면 호수처럼 넓은 연못을 만난다. 여기서 눈에 띄는 키다리 목련의 이름은 '불칸'. 꽃송이가 크고 빛깔이 유난히 붉어 화산을 뜻하는 '볼케이노'와 불의 신인 '불카누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꽃잎 모양이 별을 닮은 진분홍색 목련은 '스타워즈', 발레리나처럼 생긴 흰색 목련의 이름은 '로얄스타'다. 붉거나 하얀 목련 사이에 황목련도 눈에 띈다. 민병갈 원장이 생전에 매우 아꼈다는 '옐로버드'다. 그는 3백 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두 번째 조국으로 삼은 우리나라에 값진 선물로 남길 바랐다. 2002년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목련 나무 아래 고이 묻혔다.
태안
나무가 행복하기에 사람이 행복한 곳
천리포수목원의 주인은 나무다. 사람보다 나무의 행복을 위해 만든 곳이기에 수형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베어내지 않고 길을 만들 때도 최대한 나무를 베지 않는다. 손님의 자격으로 방문하는 우리도 나무의 행복을 나눌 수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나무와 식물뿐만 아니라 바다와 섬도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윽한 숲길을 빠져나오면 해송 숲 사이로 바다가 나타난다.
고운 모래펄이 펼쳐진 천리포해변과 암탉이 엎드려 있는 모양을 닮은 낭새섬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수목원 내 노을 쉼터나 바람의 언덕은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최고의 명당이다. 가족과 혹은 연인과 함께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신비로운 모래언덕, 신두리해안사구
화려한 꽃길 다음에 걸어볼 장소는 모래사막이다. 정확히는 1만 5,000년 역사를 간직한 국내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다. 사구는 바람에 의해 모래가 움직여 쌓이 언덕을 말한다. 길이 3.4km로 해안선을 따라 길게 형성된 신두리해안사구는 바닷가 연안이 모두 모래인 까닭에 썰물 때가 되면 넓은 모래펄이 펼쳐지고, 또 이때 바람이 불면 모래가 육지 쪽으로 올라가 언덕이 되는 이 무한 반복이 이어지며 만들어졌다. 중동의 어디쯤 같은 이색 풍경이다. 탐방로는 A, B, C 세 가지 코스로 각각 30분, 1시간, 2시간 여가 소요된다. 코스의 백미인 모래언덕에는 도장처럼 찍힌 고라니 발자국과 모래가 바람을 타고 움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사구의 모습은 지금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나라사랑 마음이 한곳에, 태안보훈공원
계절마다 꽃 축제가 열리는 꽃의 도시 태안. 가을마다 작은 국화 축제가 열리는 곳은 태안의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가 자리한 곳이다. 생가지 주변에는 보훈공원을 조성해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충령사와 참전용사기념탑,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등을 건립했다. 생가지에 있는 체험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이종일 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낭독했다.
또한, 언론인으로 제국신문 창간과 언론 활동을 왕성히 전개했고, 계몽운동가로 여성해방론을 주창하였다. 감사하게도 이 모든 업적이 한 사람의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많은 일을 했던 선생은 독립선언문을 인쇄·배포한 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제2차 3·1운동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죽는 날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으나 평생 독립 의지를 꺾지 않았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 인적이 드물어 아쉬운 이 공간에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이어져 늘 북적이며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안왼쪽부터 천리포수목원 밀러가든의 연못과 민병갈 기념관, 신두리해안사구, 옥파 이종일 선생 동상
태안
태안
태안

※ 닉네임과 비밀번호 설정 후 자유롭게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 보기



삭제하기
TOP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인스타그램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