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기억하며 평화를 걷는 시간 경기도 평택 평택은 산업과 군사, 문화가 독특하게 얽힌 도시다.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 기지와 6·25 전쟁의 흔적,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된 국제적인 거리 풍경이 공존한다. 이곳을 걷다 보면 도시 곳곳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문화의 활기가 넘치는 송탄국제거리 평택은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 도시다. 전쟁의 기억과 보훈의 무게, 그리고 첨단 산업의 동력과 다문화 일상이 교차한다. ‘송탄국제거리’는 평택이 가진 서로 다른 얼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평택국제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해외의 작은 도시 한복판에 들어선 듯 이국적인 분위기가 진하게 감돈다.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영어와 한글 간판이 뒤섞인 거리에는 미군과 외국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군복과 와펜을 파는 상점들, 튀르키예 케밥과 베트남 쌀국수, 인도 커리, 페루 음식점까지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1950년대 미군 주둔 이후 자연스럽게 조성된 이곳은 ‘작은 이태원’ 또는 ‘송프란시스코’라 불릴 만큼 독특한 문화를 자랑한다. 한때 군부대에 물자를 실어 나르던 협궤 철로 자리는 이제 알록달록한 벽화 골목으로 변신했다. 자유로운 색감과 이야기로 가득한 이 벽화들은 평택의 국제적인 분위기와 역동적인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마치 작은 갤러리처럼 이어지는 거리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문화 요소가 어우러져 관광객들의 포토존이자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 이 거리는 평택·오산공군기지(K-55)의 정문과 바로 맞닿아 있다.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철제 담장 너머로 출입 통제소와 공군기지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차로 20~30분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육군기지 캠프 험프리스가 자리한다. 한 도시에 육군과 공군,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군인 가족들이 함께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이 오늘의 평택이다. 낮에는 국제시장의 활기 속에, 밤에는 네온사인 불빛 속에 또 다른 낭만이 흐른다. 송탄국제거리를 걷다 보면 전쟁의 상흔을 넘어선 이 도시의 현재와 일상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의지까지 함께 엿볼 수 있게 된다.
조용한 언덕에서 만난 이름들, 평택 현충탑 송탄국제거리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도시의 또 다른 표정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평택관광단지 안쪽에 자리한 보훈공원이다. 평택은 6·25전쟁 초반,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국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방어선을 형성했던 격전지다. 특히 1950년 7월, 미 제24사단이 평택 북부에서 벌인 전투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지상전을 벌인 사례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싸움 끝에 평택은 함락됐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는 뼈아픈 과정을 겪었다. 맑은 호숫가 풍경을 뒤로 하고 공원에 들어서면 소나무 숲 사이로 단단한 석조 기념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말없이 서 있는 탑과 비석들 사이로 오래 전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 도시가 기억하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마주해본다. 이곳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장소가 아니라, 앞으로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조용히 새기는 공간이다.
바다 너머로 보내는 다짐, 서해수호관 평택의 해안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이 이어진다. 서해수호관은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안에 자리한 안보전시관이다.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도발 등 서해를 무대로 벌어진 북한의 도발과 그 속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해수호 55용사’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벽. 검은 대리석 위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가족이자 동료였던 존재의 기록이다. 관람객들은 이 앞에서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춘다. 전시관은 단순한 전쟁의 기록을 넘어 그 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1전시실에서는 연도별 도발 상황과 작전 경과, 실제 유품, 영상 자료 등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며, 2전시실로 넘어가면 희생자들의 일상 사진과 육성이 담긴 영상, 가족과의 편지 등 개인의 기록들이 이어진다. 관람을 할수록 ‘국가’라는 단어 뒤에 가려졌던 ‘사람’의 얼굴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깥에는 실제로 전투에 투입됐던 참수리 357호정이 정박해 있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의 기습에 맞서 싸운 해군 고(故) 한상국 중사의 이름이 새겨진 함정 위에서 관람객들은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본다. 서해수호관은 과거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곳이면서도 지금도 누군가가 바다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하는 장소다. 조용한 파도 소리 너머 우리는 이 도시가 품은 책임과 다짐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평택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음식, 버거와 부대찌개 평택을 한 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 그건 부대찌개와 버거일 것이다. ‘웨이팅 줄’이 먼저 반겨주는 ‘김네집 부대찌개’는 송탄식 부대찌개의 진수라 불린다. 일반적인 부대찌개보다 훨씬 진한 육수에 푸짐한 햄과 소시지, 묵은지의 조합이 감칠맛 있게 입안을 감싼다. 송탄역 근처 ‘미스 진 햄버거’는 1982년 좌판에서 시작해 40년 넘게 이어진 곳으로 한국식 햄버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두툼한 패티와 계란프라이, 아삭한 양배추에 듬뿍 뿌린 케첩과 마요네즈 소스는 투박해 보이지만 정성스러운 맛이다. 옛날 다방 느낌의 외관과 빛바랜 간판, 오래된 철제의자까지도 이 도시에선 문화다.
평택 속 작은 뉴욕, 카페 메인스트리트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평택인지 뉴욕인지 잠시 헷갈린다. 평택 포승읍에 있는 카페 메인스트리트는 약 1,500평 규모의 베이커리 카페로, 뉴욕의 거리 감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이국적인 장소다. 입구는 뉴욕 지하철역을 모티브로 꾸며 마치 지하철을 타고 뉴욕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 외벽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그래피티와 타임스퀘어를 연상시키는 전광판을 설치해 방문객들에게 이국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평택에 간다면 ‘평택 속 작은 뉴욕’도 잊지 말고 방문해보자.
산업과 풍경 사이, 평택항 홍보관 여행 중 잠시 호흡을 달리하고 싶을 때, ‘평택항 홍보관’은 의외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바다를 앞에 둔 위치 덕분에 전망대에 오르면 서해의 드넓은 풍경이 펼쳐지고, 내부 전시관은 평택항의 발전 과정을생생하게 보여준다. 다소 딱딱할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미디어 전시와 어린이 체험 공간도 있어 가족 단위 여행자에게도 적합하다. 흥미로운 점은 ‘전쟁과 경제’라는 이중적 배경을 가진 이 도시의 특성을 산업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것. 평택이 왜 군사 거점이면서 글로벌 무역의 허브가 됐는지 알 수 있다. 전시 관람 후에는 인근의 ‘평택항 마리나’에서 해 질 녘 바다를 감상해보는 것도 추천한다.